휘슬러에 대한 단상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Nocturne: Blue and Silver - Chelsea, 1871 @tate.org.uk

테이트 브리튼에서 라파엘 전파의 그림을 보던 중에 위의 그림이 눈에 꽃혔다. 이렇게 세련된 색을 구사하다니!!! 정말 매력적인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세인트 아이브스의 바다와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휘슬러의 자리’라고 써 있길래 누군가 했더니 바로 이사람이었구나. 마네와 더불어 검정색은 이렇게 쓰는거야라는 가르침을 주는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휘슬러—마네와 더불어 검정색은 이렇게 쓰는거야라는 가르침을 주는 작가

조금 찾아보니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자음 두개씩)의 연대기가 아주 흥미롭다. 미국 태생이면서 19세기를 휩쓸었던 프랑스 인상주의영국 라파엘 전파와 모두 교류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휘슬러의 풍경화에서는 터너의 영향을 볼 수 있고, 인물화에서는 쿠르베 및 라파엘 전파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21세에 미국을 떠나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다시 고국에 돌아온 적이 없는 그는 파리에서 쿠르베, 모네, 드가, 피사로와 함께했다고 하니 인상주의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이다. 그런 휘슬러는 일본의 목판화가 전래되고, 쿠르베의 비난을 받고, 파리의 살롱전에서 낙선하고, 당시 프랑스와 프러시아의 전쟁으로 인해 런던으로 이주한다. 이는 모네 작품에 런던이 등장하는 이유랑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피사로, 모네, 휘슬러 등이 전쟁을 피해 잠시 이주한 전력이 있고, 휘슬러는 이주한 김에 눌러 살았다.

Whistler, Symphony in White no. 1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휘슬러가 이름을 얻게 된 건 살롱전 낙선전에서 인데 요 그림이 처음으로 살롱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Symphony in White, No. 1>이고 당시 낙선전에서 호평받았다. 역시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살롱전 낙선은 필수인가. 두번째 낙선전 작품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 밀렸다고.

촉이 상당히 좋은건지 아니면 당시에 그와 성향이 맞는 그룹이 그들밖에 없었는지 런던에서 휘슬러는 라파엘 전파의 핵심이었던 로제티와 교류하게 되는데, 충분히 이해가 되는것이 쿠르베가 그의 작품을 너무 에로틱하다고 비난했다는 대목이다. 휘슬러의 인물화에서 드러나는 순백의 아름다운 여성들은 아름답고 관능적이기 때문에 라파엘 전파의 화풍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영국에서의 풍경화는 터너의 영향을 받은 듯 프랑스 인상파에 비해 더욱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색채를 드러낸다. 휘슬러는 흰색을 가미한 탁한 색조 혹은 흰색을 즐겨 썼는데, 당시 흰색은 연백이라하여 납이 주성분이었고 그리하여 휘슬러는 납중독으로 사망까지 이르게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납중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흰색을 즐겨썼다고 한다.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1871년 모델 섭외가 어려워 당시 런던에 같이 살던 어머니를 모델로 하여 초상을 그렸는데 이 작품이 훗날 미국 최초의 어머니의 날 기념우표에 등장하는 ‘화가 어머니의 초상'이라는 휘슬러의 대표작이 되었다. 휘슬러가 그림그리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4주간이나 그려야했는데 어머니가 계속 서계실수가 없어서 앉아서 그린 포즈가 나오게 되었다고. 그림은 어떠한 이야기나 외부적 요소와 관련 없이 그림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추상화의 선지자적 논리를 펼친 그의 그림 제목에는 <은색과 청색의 야상곡>과 같이 추상적 제목이 붙는다.